'미야자키 하야오의 잡상노트'라는 책이 있습니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평소 자기가 구상한 각종 전차나 항공기 등의 스케치를 모아서 낸 책이지요. 저도 그간 그런 게 있나보다 하는 수준으로만 알던 물건인데, 그 책에 실린 전차가 실제로 모형화된 게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바로 이 '악역 1호'라는 유쾌한 이름의 다포탑 초중전차입니다.
처음 사진을 보자마자 그 독특한 디자인에 '아, 이 놈은 구해야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어째 취급하는 곳이 별로 없어서 국내 샵에서 찾기 무척 힘들었는데, 참으로 고마우신 몇몇 분들의 도움으로 어떻게 연이 닿아 이렇게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근데 이거...생각보다 훨씬 더 유쾌한 물건이었습니다.
박스아트부터 감동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씨의 스케치북에서 막바로 튀어나온 것 같은 정감 가득한 손그림이로군요. 중량 2백톤에 1천마력 짜리 엔진 2기를 갖추고 온갖 살벌한 무기로 잔뜩 무장한 초중전차인데, 여기서는 그저 둥글둥글하고 귀엽기만 합니다.
악역 1호는 일반 버전(TG-01)과 대원집합세트 버전(TG-02) 두 가지가 발매중인데, 제가 구한 것은 대원집합 세트입니다. 전차 본체의 차이는 없고, 단지 승무원 인형(돼지들!ㅋ)이 3마리 짜리냐 20마리 짜리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올 9월부터 일반버전은 단종되고, 대원집합 세트만 기존의 6400엔에서 무려 5천엔으로 대폭 인하된 가격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다행히 저는 가격 인하된 신품이 수입될 때 국내에 풀릴 가격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서 다른 분의 미개봉 중고품을 넘겨받을 수 있었지요.
박스 부피도 상당합니다. 타미야 1/35 챌린저와 비교하면 폭은 거의 비슷하지만 두께가 훨씬 두껍네요. 아마 전체 부피는 MG급 건프라 박스와 비슷할 듯 합니다.
박스 둘레에는 작례 사진과 간단한 도색 가이드 및 설정에 관해 쓰여 있습니다.
박스 오픈. 상당히 큼지막한 상자 크기에 비해 내부 공간은 의외로 약간 허합니다.
연질 수지제 궤도. 고전적인 '불로 지지기' 대신 접착제로 접착 가능한 재질이라고 합니다. 디테일이 참 없어 보이지만, 이 위에 여러개의 플라스틱 이빨이 붙기 때문입니다. 순간접착제로 붙이면 안 될 것 같군요.
차체 상판. 런너도 없이 통짜 부품이 들어 있습니다. 슬라이드 금형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지요.
일견 이 쪽이 앞쪽인 것 같지만 사실은 뒷쪽입니다. 차체 후방 사령탑의 기단부가 되지요. 처음 이 킷의 완성 작례를 봤을 때에는 마이너한 업체에서 오래 전에 내놓은 어딘가 좀 허접한 키트(단차에 뭉개진 디테일에 지느러미 등)가 아닐까 싶었는데 왠걸, 타미야 귀싸대기 날리는 섬세한 몰드가 일품입니다. 아직 안 만들어 봐서 잘 모르겠지만 부품도 상당히 잘 들어맞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되네요.
기단부 윗부분과 옆의 돌출부 상판에는 왠지 요즘 전함용으로 나오는 목갑판 시트를 쓰면 효과가 좋지 싶은데, 저 몰드를 갈아내고 그걸 쓸까 말까 생각중입니다. 쥐뿔도 없는 실력에 괜히 별매품이나 탐을 내고 있네요(...).
주포탑과 차체 양 측판 런너입니다. 둥글둥글 볼륨감 넘치는 부품들이군요.
가늘고 또렷한 패널라인과 리벳 표현이 일품입니다. 이 사진만 갖고는 잘 안 보이지만, 장갑판 패널끼리 표면이 고르지 않고 단차가 조금씩 있습니다. 프레임에 장갑판을 고르게 붙여나간 게 아니라 장갑판을 이리저리 덧대 만든 느낌을 재현한 건데, 미야자키씨의 설계 지시인지 타스카 측에서 나름대로 응용한 부분인지는 몰라도 정말 재미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킷에서 세 번째로 유쾌한 점이었네요.
측면 후방의 방열 슬릿. 지느러미 안 붙어있나 싶어서 뒤집어 봤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주포탑. 주조질감을 표현한 건지는 몰라도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약간 울퉁불퉁합니다. 다만 도색 후에는 그다지 티가 안 날 것 같네요. 어디서 보니 순접을 전체적으로 바르고 칫솔로 두드려 주는 기법을 쓰는 분도 계시던데...귀한 키트에 모자란 실력으로 그런 짓 하다가 큰일날 성 싶어서 아예 시도도 안 해 볼 생각입니다'ㅅ'
복잡한 형태의 주포 만틀렛도 통짜로 뽑아줬습니다.
보기만 해도 질려버리는 자잘한 부품 덩어리. 주로 휠과 부무장 및 궤도 관련 부품입니다. 그래도 일반 1/35 전차킷보다는 훨씬 적은 편입니다. 다만 궤도 만들 때 좀 질리지 않을까도 싶네요.
이 킷에서 젤루다가 유쾌한 부분. 바로 악역대령과 그 부하들의 피겨입니다! 스케일이 스케일인지라(더구나 그림으로 표현된 캐릭터이기도 하고) 그리 디테일이 정밀하지는 않지만, 그림 속의 바로 그 느낌만은 아주 잘 살려낸 멋진 인형들이지요.
참고로 같이 들어 있는 클리어 부품은 관측창이나 서치라이트, 큐폴라 쪽에 쓰입니다. 이제는 전차 킷에도 클리어부품 정도는 상식인 시대가 왔나 봅니다. 투명 플라판 한 장 덜렁 넣어주고 모델러가 직접 재단해서 쓰라는 업체도 어디 있다고 하던데...(두리번)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악역 대령'. 이빨을 드러내고 사악하게 씨익 웃는 표정...이지만 보고 있으니 그저 유쾌하기만 합니다. 이미 이름에서부터 작중 최후가 정해져 있을 것 같다는 점만 뺀다면 말이죠...^^
요기서부터는 '대원집합 세트'에만 들어 있는 런너들입니다. 왼쪽 뭉치는 전차병 3마리짜리 런너가 4벌. 각 런너마다 위의 악역 대령 피겨에 같이 찍혀 나온 고글 쓴 전차병과 똑같은 피겨가 2마리, 고글을 벗은 전차병이 1마리씩 들어 있습니다.
오른쪽 런너의 근접샷. 위의 러닝셔츠 차림 돼지 두 마리는 기관병이고, 밑에는 후라이팬을 든 요리사와 집사, 그리고 새끼돼지가 들어 있습니다.
아놔 요 귀여운 놈을 어쩜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손톱만한 새끼돼지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만 나옵니다. 이 놈 색칠할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군요^^
무슨 매뉴얼이 넉 장이나 들어 있길래 뭔가 했습니다. 저 중 두 장이 조립 매뉴얼, 한 장은 기본 도색 매뉴얼, 나머지 한 장은 대원집합 세트용 추가 도색 매뉴얼입니다.
두 장은 원래 한 벌인데 따로 분리되어 들어 있군요. 저렇게 겹치고 가운데를 스테이플러로 찍어놔야 정상일 거 같은데.....왜 안 그랬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
요즘 설명서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조립 가이드가 정말로 친절합니다. 어떤 부품을 먼저 붙여야 하고, 이 부품을 쉽게 조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 모델러가 따로 고민할 필요 없이 그대로 따라만 해도 될 정도로 상세하기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도 참 기분이 좋군요.
대원집합 세트에만 들어 있는 추가 피겨 도색 가이드. ....보고 있자니 웃겨 죽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웃겨 준 도색 매뉴얼의 한 컷. 역시 미야자키씨가 손으로 그린 악역 1호의 내부 구조도입니다. 귀여운 돼지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포탄을 옮기고 장비를 조작하는 모습도 모습이지만, 침실과 식당과 주방까지 갖춰진 구조도는 물론이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식재료와 기타에까지 지시선 긋고 천연덕스럽게 '고로케용 고기' '기타'라고 설명 붙여놓은 부분에 이르러서는 그저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것 외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크핫핫핫핫...! 상상이 되지 않나요? 당장이라도 연기를 뿜으며 털털 굴러가는 악역 1호와, 사령탑 위에 올라앉아 거만하게 웃는 악역 대령, 이들에게 납치된 아름다운 소녀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맨몸으로 달려드는 주인공 소년의 모험이 스크린에 비춰질 것만 같습니다. 그야말로 '미야자키 다운' 설정이 아닐 수 없네요.
아직 봉지도 뜯지 않았지만, 눈으로나마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시종 감탄과 웃음을 연발하게 만든, 너무나도 유쾌하고 즐거운 제품이었습니다. 유쾌하기만 한 것 뿐만 아니라 품질도 우수한 그런 물건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조립을 해 봐야 진짜로 유쾌한 지 아닌 지 알 수 있겠지만...
미야자키씨의 유쾌한 상상을, 그에 못지않게 유쾌하면서 동시에 실력도 있는 회사가 제품화한 좋은 물건을 접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워낙 벌려놓은 일이 많아 그거 다 수습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봉지를 안 깔 생각이지만,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제목 : 타스카 1/72 악역 1호 조립 완료 한 달하고도 반 쯤 전에 구입했던 타스카의 1/72 악역 1호를, 결국 참지 못하고 얼마 전에 봉지를 까게 되었습니다. 짬짬이 만들다 보니 한 사흘 정도 걸리는군요.
/72 스케일이지만 워낙 거대한 초중전차라 1/35 현용 3세대 전차 킷과 맞먹거나 오히려 능가하는 볼륨감입니다. 차체 기준으로 길이는 좀 짧고 폭과 높이가 더 넓고 높아서 통통하고 볼륨감 넘치는 스타일이지요. 여기저기 붙어 있는 마스킹 테이프는 도색 관계로 아직 접착하지 않은 ......more